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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부탁 : 호의가 계속되니 호구잡혔나?
    보츠와나 2019. 8. 17. 20:19

     현지인 교사들을 보고 있으면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가끔 궁금해진다. 교직원 명단에는 ‘Korean Voluteer Teacher’라고 써 놓은 걸 보면 한국에서 온 교사라는 점은 알고 있는 것 같다.

     

    교장이 나를 가장 자주 찾는 일은 컴퓨터 작업을 도와달라는 것이다. 과장 좀 섞으면 요즘 들어서 거의 매일 부른다. 처음 1학기 동안은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. 첫 만남에서 내가 컴퓨터 수업을 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, ‘네가 해봐야 얼마나 하겠니라고 생각했었나보다. 그러던 중 2학기에 성적을 정리하는 작업을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, 교장이 요청한 대로 전교생의 성적을 관리하고 결과를 확인 할 수 있는 파일을 만들어줬다. 그 뒤로 부쩍 자주 찾는다. 서식을 바꿔 달라, 엑셀 수식 좀 입력해 달라, 두 개의 문서를 합쳐달라. 크게 어렵진 않았는데 자주 찾다보니 슬슬 귀찮아지기도 시작했다. 그러던 중 며칠 전에 학생들 출석을 정리하는데 전교생의 출석을 입력해달라고 말하는 것이다. 처음에는 그저 엑셀 양식을 만들어달라는 줄 알았는데, 전교생 출석부를 주면서 나에게 입력하라고 말했다. 잠시 벙 쪘다. 그리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수업을 핑계로 빠져나왔다. 어느 정도 심증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확증이 되었다. 교장은 나를 ‘ICT Officer’로 생각하고 있다. 그 전에 이런 일을 도와주던 ICT Officer2학기 초에 그만 두었다. 계약 만료라고 들었다. 아무튼 그 사람의 대신으로 여기나보다.

     

    문제는 교장만 그런 것이 아니다. 다른 선생님들도 비슷하다. 아마도 전 교직원의 노트북은 다 내손을 한 번씩 거쳐갔을 것이다. 누구의 소행인지 몰라도 대부분 같은 문제였다. 하나의 노트북에 여러 버전의 MS-Office가 설치되어 있었다. 그러면서 워드파일이 실행이 안 되었다. 정품을 구매했으면 상관 없지만, 여기는 정품을 찾기 어렵고 있다고 하더라도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1달 월급에 가까운 라이센스를 구매할 수 도 없다. 그렇다고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는 것도 아니니 대부분 불법 설치이다. 이런 노트북이 내 손으로 들어오면 모든 버전의 오피스를 삭제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사용가능한 MS-Office를 설치해주었다. 그러는 와중에 자신의 노트북이 안 켜진다, 노트북이 너무 느리다 등등, 별 희한한 요청도 많이 받았다. 물론 도와 줄 수 있는 부분은 도와주겠지만 이런 경우 노트북이 너무 오래됐다든지, 기계적인 문제여서 내가 어찌할 수 없었다. 그러던 와중에 앞서 교장이 출석부를 입력해달라고 부탁한 것과 비슷한 정도의 어처구니 없는 부탁을 들었다.

     

    7학년 C반에 수학 수업을 갔을 때였다. 수업을 하던 중 담임교사가 들어왔다. 수업이 1교시였기에 아마도 회의갔다 왔나보다 생각하고 있었다. 담임교사가 수업 중에 나에게 노트북을 들고 오더니 업데이트를 해달라고 부탁했다.

     

    - MR.Lee, 내꺼 노트북 업데이트 해줘.

     

    - 무슨 업데이트?

     

    - 윈도우랑 오피스랑, 백신이랑 등등 다 업데이트 해줘.

     

    - ???

     

    순간 어이가 없어서 피식했다. 그리고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영어로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했다.

     

    - 업데이트를 하려면 인터넷이 있어야하는데 나는 인터넷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. 그리고 업데이트 정도는 네가 직접 할 수 있으니까 직접 해라. 나는 그런 일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다.

     

    인터넷을 쓸 수 없다고 하니 학교 와이파이를 쓰면 된다면서 여러 번 부탁했지만 끝내 거절했다. 일단 학교 와이파이는 메신저 메시지조차 보낼 수 없는 쓰레기이고, 업데이트를 도와달라는 요구 자체가 가당치 않았기 때문이다.

     

    처음 보츠와나에 올 때 이 곳 사람들은 부탁을 거절하는 걸 싫어한다고 들었다. 자존심이 세서 그럴 수 도 있지만, 자신의 부탁을 누군가 거절해주는 걸 불쾌해한다고 들었다. 반대로 누군가 자신에게 부탁할 때도 잘 거절하지 않는다고 한다. 그래서인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물어보거나 부탁하면 모두가 친절했다. 이런 점을 감안해서 현지교사들의 부탁을 웬만하면 들어주려고 노력했다. 출장으로 선생님이 없는 교실에 가서 수업도 여러 차례 했었고, 시간표에는 없지만 교사가 직접 찾아와서 수업을 더 해달라고 할 때도 해줬다.

     

    그런데 앞서 말한 두 가지의 경우는 자신이 할 일을 떠맡기는 걸로 느껴졌기에 거절하거나 도망갔다. 현지인들의 문화고 뭐고 아닌건 아닌거였다. 당사자는 방법이 없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. 그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에게 떠맡기는 모양새였다. 가뜩이나 이곳에서의 나의 역할에 대한 고민과 회의감에 대해 생각하던 시점에 있었던 일들은 고민을 더 하게 만들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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Written by Lee Gyuseong.